[정기수기자] 의료사고 발생시 환자가 소송을 제기하지 않고 독립기구를 통해 분쟁을 해결토록 하는 '의료분쟁조정법'이 마침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23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국회는 11일 오후 본 회의를 열고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안'을 재석 233명 가운데 찬성 223명, 반대 1명(기권 9명)으로 가결시켰다.
이에 따라 의료분쟁조정법은 대통령 승인을 받아 공표되면 1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이르면 내년 4월부터 시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에 통과한 의료분쟁조정법은 독립적 조정기구가 의료분쟁을 해결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법안에 따르면 의료분쟁이 발생했을 경우 환자의 입증 책임 부담을 줄이고 의료분쟁을 소송이 아닌 조정을 통해 신속·공정하고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을 설치하고, 중재원 내에 의료분쟁조정위원회와 의료사고감정단을 설치했다.
의료사고 발생시 감정단을 통해 의료사고를 조사하고, 조정위원회에서 과실 정도와 환자의 귀책사유 등을 고려해 손해배상액을 결정토록 했다.
또 업무상 과실치상죄에 대한 반의사불벌 적용(형사처벌 특례)과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에 대한 국가의무과실 보상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그간 첨예한 찬반 논란을 불러 일으켜 왔던 의료사고의 '입증책임 전환' 문제, 즉 의료사고 발생 시 의사가 스스로 무죄를 입증토록 해 처벌을 면하도록 하는 조항은 진료기피 등의 위축진료 또는 불필요한 검사시행 등 과잉진료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판단으로 삭제됐다.
이번 법안이 시행되면 그동안 의료분쟁에 따른 사회적·경제적 비용을 줄일 수 있지만, 환자가 의료사고에 대한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불가능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입증책임 전환' 조항이 삭제돼 향후 논란의 여지가 많다.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민주당 최영희 의원은 "법 논의 시작 23년 만에 의료사고 피해자의 신속한 구제가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면서도 "환자가 의료사고에 대한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불가능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입증책임 전환이 도입되지 않은 점은 아쉬움이 많다"고 말했다.
시민단체 등의 반대 목소리도 높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은 성명을 통해 "의료사고로 인한 피해구제 제도의 핵심은 의료사고의 원인과 그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의료인이 자신의 무과실을 입증하도록 한 '입증책임전환'의 명시적 규정을 배제하면서도 의료인에게 형사책임특례를 허용함으로써 환자에게 일방적 양보를 강요한 의사특혜법이라는 우려를 표한다"고 비난했다.
논란의 핵심은 국회를 통과한 의료분쟁조정법이 환자에게 입증책임을 부담시켰다는 데 있다. 의료사고의 원인과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일은 의료행위의 전문성 및 밀실성을 특성으로 하고, 증거자료인 진료기록도 의료기관에서 기록한 자료에 의존해야 하는 상태에서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 국민이 이를 증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
즉 의사에게만 특혜를 허용함으로써 의료 과실과 관련된 사회적 비용까지 국민들이 부담하게 했다는 주장이다.
통과한 수정법안에는 이 법의 핵심 골격이자 법제정의 실효성을 판단하는 주요 근거인 입증책임전환 규정이 삭제되고 그 대신에 의료분쟁조정중재원 설치와 감정기구를 별도로 두었다.
하지만 경실련은 "독자적인 감정기구를 설치한다고 해도 실제 해당 의료인이 아니고는 수술실이나 중환자실에서의 의료행위의 전 과정을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는 상황"이라며 "입증책임에 대한 명시적 규정 없이 의료행위를 둘러싼 과실 유무와 인과관계를 규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경실련은 "이번에 국회를 통과한 법안이 의료사고의 실체적 진실은 규명하지 못한 채 의사에게 면죄부만 주는 반면 조정과정을 통한 환자들의 피해구제의 실익과 실효성은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며 거듭 유감을 나타냈다.
건강세상네트워크 관계자도 "현재 환자에게 주어져 있는 입증책임을 의사에게 전환하는 것이 명시돼 있지 않다"며 "의사 편들기 조항"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정부와 의료계의 입장은 사뭇 다르다.
대한의사협회는 "시민단체들이 환자와 환자보호자에게 의료사고에 대해 입증하도록 한 법안 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지만, 기존 다른 법안과 형평성 측면을 고려했을 때 적절하다고 판단된다"며 "의사에게도 적극적으로 진료에 임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고 기대를 나타냈다.
복지부 관계자는 "의료분쟁 소송에 따른 사회적 경제적 비용과 이에 따른 환자의 고통을 덜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는 것"이라며 "의사도 입증책임이 없지만 환자에게도 입증책임이 최소화돼 양 당사자간의 적정한 타협점을 이룬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의료사고에 대한 객관적 조사가 실시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며 "현재까지는 통상적으로 환자가 입증책임을 져야 했지만 입증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으로 감정단이 중립적 입장에서 사실관계조사를 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정기수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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